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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검난무-미칸바 (미카즈키x야만바기리)] 하얀 밤에 뜬 달



for. sw(@toadtin) 님


 마당 이곳저곳에 피워진 화톳불빛이 삼경을 살랐다. 한껏 낮춘 목소리들은 소리의 주인을 막론하고 끝이 흐렸다. 한숨에 베여 토막난 말들이 다급한 발걸음에 짓밟혀 삐걱대며 부서졌다. 노상 천진한 아와타구치의 아이들조차 몸을 사렸다. 너른 혼마루가 온통 소요하여 적요했다.


 미카즈키 무네치카는 무릎께에 누운 검을 들여다보았다. 낡은 거적으로 다 가리우지 못하던 미모는 함부로 난 상처로 빼곡했다. 향유 적신 명주수건을 갖다 대자 부르튼 입술 사이로 가는 신음이 흘렀다. 아직 보드라운 미간에 깊이 새겨지는 주름을 바라보며 미카즈키는 고요히 읊조렸다.


 -밝아서 깊은 밤이로고.


 천 년을 사는 동안 훤한 밤이란 언제나 흉조였다. 미카즈키는 곁에 앉은 산죠의 아이에게 화톳불을 하나 끄라고 일렀다. 아이는 잰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장작 타는 소리가 멀어지고 대낮같던 방 안에 엷은 어둠이 내렸다.



*


 케비이시 토벌 명령을 전하던 사니와의 얼굴은 전에 없이 결연했다. 힘든 싸움이 되겠지요. 사니와는 그간 모아 두었던 최정예병들을 빠짐없이 집결시키고 도검남사들의 무장을 몇 번이고 가다듬은 후에야 침소의 불을 지웠다. 풀벌레조차 울지 않는 적막을 지새며 불안으로 뒤척이지 않은 이가 없었다.


 다음날, 미카즈키는 혼마루에 남는 도검남사들과 함께 부대를 배웅했다. 선봉은 사니와를 가장 오래 보필한 야만바기리 쿠니히로였다. 미카즈키가 사니와 일행을 만난 날도 그가 선봉이었다. 어린 인간과 젊은 칼이 나란히 꿇어 엎드려 미카즈키를 맞았다. 고개를 들라 이르자, 공손히 미카즈키를 우러르는 인간의 표정이 여물었다. 젊은 칼은 자신을 야만바기리 쿠니히로라 했다. 그 이름에 짐작이 가,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영검을 본땄다는 쿠니히로의 아이로구나.


 젊은 칼은 긍정도 부정도 않은 채 머리에 두른 두건을 더욱 깊이 눌러 써 얼굴을 가렸다. 미카즈키가 전각을 내려와 그들 곁에 설 때까지도 젊은 칼은 끝끝내 얼굴을 다시 내보이지 않았다. 혼마루에 당도한 후에도 젊은 칼은 집요할 만큼 그를 피했다. 곁방을 쓰는 츠루마루 쿠니나가에게 야만바기리에 대해 묻자 츠루마루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픈 구석을 건드렸구먼. 미카즈키는 그제야 야만바기리가 그토록 자신의 얼굴을 거리끼는 이유를 짐작했다. 늙은이의 주책을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좀처럼 틈을 내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 후로 변변히 말조차 섞어보지 못하고 달포 가까운 시간이 흐른 참이었다.


 그 날은 유난히 바람이 거세어 야만바기리가 두른 흰 두건이 어지럽게 휘날렸다. 아와타구치의 아이들은 제 맏이의 뒷모습이 빠끔한 고갯길 너머 사라지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미카즈키는 곁에 선 아이의 작고 동그란 뒷머리를 쓸어주었다. 아이는 푸른 눈에 눈물을 그득 담고 미카즈키를 올려다보았다. 혼마루로 돌아가는 길에 도검남사들이 떨구는 그림자가 길었다.


 불길한 적요 속에서 해가 높이 떠오르고, 기울고, 마침내 날이 저물어 어슴푸레한 하늘에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도 출정한 도검남사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사니와가 자리를 비울 때면 혼마루의 살림살이를 도맡는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가 집안 구석구석 불을 밝히고 도검남사들을 몇 뽑아 출정부대를 마중 나가도록 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야겠지요.


 미츠타다는 상석에 앉은 미카즈키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미츠타다의 표정이 더없이 침통했다. 혼마루에 느지막한 발걸음을 한 이래, 여지껏 궂은 일 한 번 한 적 없이 누구에게나 공대를 받으며 귀히 모셔졌던 미카즈키였다. 미카즈키는 옷자락을 가볍게 떨치며 일어섰다.


 -가세.


 의술에 조예가 깊은 야겐 토시로의 지휘 아래 미카즈키를 비롯한 혼마루에 남은 모든 도검남사들이 그를 도왔다. 다 부질없는 일이라면 좋을 텐데요. 누군가가 한숨처럼 말했다.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낮 동안 잦아들었던 바람은 어느새 되살아나 아침나절보다도 거세게 불었다. 흔들리는 불길 따르듯 미카즈키의 마음도 수런거렸다.


 병상 준비를 마치고도 긴 기다림 끝에 가까스로 대문 밖이 소란해졌다. 날렵한 아이들이 먼저 대문께로 내달렸다. 이내 터져 나오는 비명과 울음. 제가끔 드리웠던 시름이 끝내 체념으로 내려앉는 모양새가 불빛에 명명했다. 문간으로 향하는 검들을 따라 미카즈키도 비탄의 틈새로 발을 내딛었다.



 단 한 자루의 검조차 자력으로 문간을 넘지 못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에 젖은 검들이, 마중 나갔던 도검남사들의 등에 업혀 돌아왔다. 모두 상처가 깊어 위중했다. 행렬 끝에 그들의 사니와가 이와토오시의 등에 업혀 들어섰다. 몹시 지친 기색이었다.


 -미안합니다.


 사니와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사과하며 소맷부리로 눈시울을 가렸다. 미츠타다는 사니와를 받아 안고 내실로 향했다. 남겨진 도검남사들은 야겐의 지시를 따라 병상으로 향했다. 미카즈키는 야만바기리의 수발을 자청해 그의 머리맡을 지켰다.


 야만바기리는 출정을 나가지 않는 날도 두건을 깊이 눌러 써 좀처럼 맨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미카즈키는 아침나절 조기(弔旗)처럼 펄럭이던 그의 두건을 떠올렸다. 천 년. 수많은 물생의 삶과 죽음을 보았으면서도 남겨지는 아픔은 여전히 미카즈키를 오래 슬프게 했다. 하여, 미카즈키는 몇 번 이야기를 나누어보지도 못한 이 젊은 검의 생환이 마냥 애틋했다. 미카즈키는 기특하게 살아 돌아온 얼굴을 조심스레 쓸었다.



*


 얼굴에 닿는 서늘한 감촉이 깊은 늪 속에 잠긴 야만바기리의 의식을 길어 올렸다. 눈을 뜨자 흰 밤하늘에 한 쌍의 초승달이 빛나고 있었다. 초승달은 돌연한 어둠 속에 숨었다 떠오르고, 다시 숨었다 떠올랐다. 초승달 너머 동그마니 비추이는 금빛 그림자마저 상서로웠다. 저승의 달은 이토록 여리고 아름다운가. 손을 뻗어 움키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이나 넋을 잃고 달을 바라보던 야만바기리는 문득 달 너머 드리운 그림자가 자신의 얼굴임을 뒤늦게 깨닫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도로 찾아든 어둠 속, 귀에 선 목소리가 울렸다.


 “정신이 들었구나.”


 먼발치에서밖에 들은 적 없는, 그러나 결코 잊을 수는 없는 목소리. 하고많은 도검남사들 가운데 왜 하필 이 자가. 야만바기리의 가슴 속에, 조각난 육신의 아픔마저 잊힐 부끄러움이 밀어닥쳤다. 팔이 움직인다면, 적어도 고개를 가눌 수만 있다면. 그러나 야만바기리가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눈꺼풀과 혀 정도였다. 야만바기리는 얼굴을 가리우는 대신 울부짖듯 신음했다.


 “가, 보지 말아 줘…… 제발…….”


 아랑곳없이 머리맡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마냥 느긋했다.


 “잘 참아내고 살아남아 주었구나. 장하도다. 좋은지고, 좋은지고.”


 서늘한 손이 뻗어와 베게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야만바기리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천하오검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초승달이, 더없이 추악한 자신을 비추고 있음에 야만바기리는 차라리 부서져 먼지가 되고 싶을 지경이었다. 눈조차 뜨지 못하는 야만바기리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길이 서서히 미끄러져 감은 눈꺼풀 위에 내려앉았다.


 “그대와는 좀처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지. 왜 그토록 나를 저어하느냐?”


 대답을 듣지 않고는 손을 물려 줄 기색이 아니었다. 야반바기리는 쥐어짜듯 일갈했다.


 “나는 가짜야……. 당신 같은 검의 눈에 비칠만한 존재가 아니야.”


 잔뜩 쉬어 갈라진 목소리 끝에 장지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겹쳤다. 눈꺼풀 위에 얹혔던 손이 불쑥 거두어지고 야만바기리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떴다.


 “실례하겠습니다.”


 장지문이 열렸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사니와가 미츠타다와 헤시키리 하세베의 부축을 받으며 서 있었다. 몸은 추스른 모양이었지만 얼굴빛이 핼쑥했다. 사니와는 목례하고 방 안으로 들어서 미카즈키의 곁에 정좌했다.


 “야만바기리 쿠니히로, 좀 어떻습니까.”

 “……곧 괜찮아 질 거다.”

 “미안합니다. 내가 판단을 잘못한 탓입니다.”


 사니와는 이어 미카즈키를 향해 깊이 조아렸다.


 “제가 부덕한 탓에 결례가 많았습니다. 벌써 날이 밝았습니다. 공께서는 이만 쉬시지요. 과로하셔 몸이라도 상하실까 두렵습니다. 야만바기리의 수발은 하세베가 들 것입니다.”


 미카즈키는 이맛살을 가볍게 찌푸리며 답했다.


 “하세베도 밤새 주공을 간호했을 게 아닌가. 나는 괜찮네.”

 “하지만…….”

 “주공, 나도 언제까지나 손님 행세를 할 생각은 없네. 늙은이의 소일이라 생각하고 이 아이는 내게 맡겨두시게.”


 사니와는 전에 없이 완강한 미카즈키의 뜻을 꺾지 못한 채 야만바기리를 잘 부탁한다고, 다만 무리는 하지 말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일어섰다. 장지문이 닫히고 세 사람 분의 마룻바닥 삐걱이는 소리가 멀어졌다. 야만바기리는 그제야 사방이 밝은 까닭이 흰 밤 때문이 아니라 날이 밝아서였음을 깨달았다. 장지문 너머를 건너다보던 눈동자가 야만바기리를 향했다. 다시금, 하늘에 한 쌍의 달이 떴다. 야만바기리는 두려웠다.


 “왜…… 당신이 날 돌보려는 거지?”


 씹어뱉은 말에 초승달이 부드럽게 휘었다.


 “아름답고 기특한 것은 가까이 두고 보고 싶은 성미란다.”


 어린 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조에 수치는 울분이 되었다. 바짝 마른 성대로는 이제 소리도 양껏 낼 수 없었다. 치미는 매도를 억지로 삼키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시야가 흐려져 달이 희미하게 명멸했다. 끝끝내 흘러넘친 눈물이 눈꼬리를 따라 길게 흘러내렸다. 바스락, 비단 구겨지는 소리가 나며 멀었던 달이 야만바기리의 눈앞에 성큼 내려왔다.


 “내게 화가 났었더냐.”


 야만바기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카즈키의 말에 그른 곳이 없었다. 자신은 영검 야만바기리의 위작이고, 설령 부서진다 해도 위작이라는 사실만큼은 변치 않을 것이다. 뼛속 깊이 새겨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지상의 것이 아닐 아름다운 입술 사이로 준엄한 말이 흘러나왔을 때, 야만바기리는 위작일 바에야 부러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야만바기리라는 이름이 그토록 저주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문득 숨결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부드럽고 따뜻한 혀가 야만바기리의 젖은 눈꼬리를 훑어 눈물을 거두었다. 야만바기리는 숨을 들이켰다.


 “너는 아름답단다. 네가 야만바기리를 본따 만든 검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다면, 네가 아름다운 검이라는 사실 또한 변하지 않을 일이다. 게다가 이 늙은이는 눈이 어두워 네 아름다움을 보는 것만으로도 버겁구나.”


 그러니 부러지지도, 휘어지지도 말고 오래오래 살아가거라. 미카즈키의 말은 노래처럼 흘러 야만바기리의 지친 몸을 휩쌌다. 모처럼 거두어졌던 눈물이 방울방울 솟아 흰 하늘에 물빛 은하수를 그렸다. 은하수 너머 뜬 한 쌍의 초승달빛이 몹시도 다정스러워, 야만바기리는 태어나 처음으로 아이처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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