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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하야] Freeze


-날조 주의


1.


 “더 이상은 안 돼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두 다리를 천천히 내렸다. 긴장이 풀리며 가벼운 어지럼증이 일었다. 악물고 있던 마우스피스를 뱉어냈다. 점막을 누르는 이물감이 사라져 한결 편안해졌다.


 마우스피스는 토마리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재활 시작 후 며칠 지났을 즈음이었다. 입술 살갗은 유난히도 얇아, 재활치료 도중 몇 번 깨물었을 뿐인데도 금세 너덜대 피가 비치곤 했다. 상처를 눈치 챈 토마리는 손을 뻗어 말라붙은 핏자국을 지우려는 듯 내 입술 위를 지그시 부벼 주었다. 몇 번이고 같은 자리를 오가던 손가락이 거두어지고 이내 토마리의 얼굴이 다가와 무의식중에 시선을 떨구었다. 젖은 혀가 상처투성이 입술 위를 훑을 때마다 엷은 아픔이 잔물결처럼 일었다. 나는 숨조차 죽이며 입을 열었다. 벌린 입 안으로 미끄러져드는 혀의 감촉이 여전히 생경했다.

 

 다음 문병일, 병실을 찾은 토마리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반지 치고는 크지 않냐고 농을 던졌지만 토마리는 웃지 않았다. 상자 속에 든 것은 반투명 마우스피스였다. 고무냄새가 짙었다. 꺼내어 입 안에 물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토마리는 웃는 대신 깊이 고개 숙였다. 입 속을 채운 마우스피스 탓에 말문이 막힌 나는 묵묵히 토마리의 정수리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침으로 흥건히 젖은 고무조각을 손바닥 안에서 굴리며 휠체어에 몸을 실었다. 간호사는 휠체어를 밀어 주치의의 방으로 향했다. 재활센터가 소아병동 근처라 오가는 사람 가운데 어린아이가 많았다. 보호자들이 아무리 만류해도 아이들은 툭 하면 내달렸고 금세 넘어져 예리한 소리로 울었다. 등 뒤로 멀어져가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생각하곤 했다. 인간은 제 목조차 가누지 못할 핏덩이로 태어나 스스로 몸을 뒤집고, 네 발로 기고, 두 발로 서고, 걷고, 달릴 수 있는 존재로 자란다. 동물의 성장이란 단지 세포가 분열하고 커지며 체적을 늘려가는 현상을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다. 활동영역을 넓히면서 자신을 그 범위만큼 확장시키는 개념이기도 하다. 그런 성장은 동물 개개의 욕망이나 의지가 개입된 결과일까, 아닐까. 만일 욕망과 의지의 소산이라면 인간이 자연스레 걷고 달릴 수 있는 존재가 되기까지 얼마나 치열한 바람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토록 뜨거웠던 열망이 어떻게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잊힐 수 있을까.


 특별히 사색이나 선문답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굳이 나눈다면 오히려 외향적인 체육계로 분류될 것이다. 성인이 되어 자립하기까지 꼬박, 세계가 드넓고 정의는 법의 형태로 명백해, 모호한 물음들에 연연하며 숙고할 틈이 없었다. 현장 일선에서 뛰며 갖은 위험에 맨몸을 드러내면서도 내 세계가 중환자실 침대 위, 한 평조차 못 되는 크기로 쪼그라들리라는 상상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생의 격변 한가운데서 나만이 변치 않을 도리는 없었다.



 주치의의 지시를 따라 다리를 움직여 보였다. 힘주어 악문 잇새에서 빠득빠득 상아질 갈리는 소리가 났다. 인공관절을 넣고 철심을 몇 개나 박은 다리는 내 살이며 내 피가 흐르는 기관이었지만 그 근본만큼은 이물임을 상기시키려는 양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갓난아기도 처음 고개를 가누고 몸을 뒤집을 즈음에 이런 고통을 느꼈을지 모른다. 마우스피스가 손 안에서 우그러들었다. 됐어요, 좋습니다. 의사의 말이 복음처럼 들렸다. 숨을 몰아쉬며 바로 앉았다.


 “지금까지는 아주 좋습니다. 환자에게 적극적인 재활의지가 있으면 회복도 빠르죠. 하지만 너무 욕심을 낼 필요는 없어요. 서둘면 탈이 나는 법입니다. 다른 근육이 놀랄 수도 있고, 재활훈련 자체에 스트레스를 받아 없던 병을 얻는 환자분들도 계시니 조바심 내지 말고 프로그램대로 진행합시다.”


 하야세 씨는 아직 젋고, 시간은 많으니까요.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2.


 병실로 돌아와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머리를 감고 몸을 닦아냈다. 깨끗이 씻은 마우스피스를 서랍 안에 갈무리해두고 새 환자복으로 갈아입었을 즈음 나직하게 병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간병인이 답하자 문이 열리며 노란 프리지아 꽃다발을 안은 시지마 키리코가 나타났다 그녀가 들어서자 병실 안으로 봄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간병인은 키리코와 엇갈려 나가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직접 물어 온 적은 없으나 내심 그녀를 내 연인이라 짐작하는 눈치였다. 터무니없는 오해였지만.


 토마리의 새 버디 시지마 키리코는 토마리와 함께 문병을 온 뒤로 토마리의 비번을 피해 서너 주에 한 번 꼴로 문병을 왔다. 바쁠 텐데 내게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고 몇 번인가 만류해도 막무가내였다.


 “하야세 씨는 제 선배님이시기도 한 걸요.”



 그녀는 눈이 맑고 복숭아마냥 발그레 여린 뺨을 가진 사람이었다. 처음 그녀를 마주하던 날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감당할 수 있을지 솔직히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사사건건 삐걱대던 눈치도 잠시, 이제는 죽이 꽤 잘 맞는 파트너가 된 모양이었다. 물론 둘 관계가 어떻든 간에, 시지마 키리코가 정기적으로 내게 문병을 오고 있다는 사실이 귀에 들어간다면 토마리는 불쾌해할 것이 뻔했다. 그러나 그녀는 토마리가 말해주지 않는 토마리를 말해줄 귀중한 방문객이었다. 글로벌 프리즈 이래…… 내 사고 이래 멈추었던 토마리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현실 앞에서, 나는 그녀의 바람을 단호히 물리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했다.



 “하야세 선배님, 요즘은 좀 어떠세요? 어디 불편하신 데는 없으세요?”


 시지마 키리코는 사 온 과일을 쟁반에 받쳐 들고 침대 곁으로 다가앉았다. 손끝 무딘 그녀를 대신해 과도를 들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조금 전에 재활치료를 마치고 돌아온 참이라 좀 피곤한가 봐요. 재활은 열심히 받고 있어요. 의사도 순조롭다고 했고요. 정말요? 다행이에요. 오랫동안 누워 계셔서 많이 힘드실 텐데 식사 잘 챙겨 드시고요. 항상 고맙습니다. 토마리 쪽은 어떻습니까? 토마리 선배도 요즘 힘내고 계세요. 


 고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단어들로 빚어지는 토마리는 내가 알던 모습일 때도 있었고, 본 적 없는 모습일 때도 있었다. 그리고 방문이 거듭될수록 그녀가 전해주는 세계 속, 내가 알던 토마리의 모습은 점차 드물어져갔다.


 “참, 선배님께 꼭 말씀드리려던 일이 있었어요. 제 남동생이 한동안 미국에서 카메라맨으로 활동하다가 얼마 전에 귀국했거든요.”

 “남동생이 있으셨군요.”

 “네, 다혈질이고 부족한 점도 많지만 제겐 늘 의지가 되는 착한 아이에요. 그 애가 지난 사건부터 특상과 일을 돕게 되었어요. 따지고 보면 멋대로 밀고 들어온 거긴 한데, 과장님께서 허락해주신 덕택에…….”


 재잘대며 동생의 이야기를 하는 얼굴은 유난히 밝아 동생에 대한 사랑을 실감케 했다. 물론 토마리의 이야기를 들려 줄 때도 그녀의 표정은 밝았지만 이런 표정은 아니었다.


 “…그래서 토마리 선배가 제 동생에게 브레이크가 되어 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정말 깜짝 놀랐어요. 토마리 선배가 브레이크라니!”


 마주한 얼굴을 보며 꽃처럼 웃는다는 고리타분한 비유가 떠올렸다. 물큰한 프리지아 향기는 협탁 위에 둔 꽃다발이 아니라 그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닐까. 병실은 건조해 목이 바짝 말랐다. 창문을 열고 싶었다.


 “브레이크라는 말과 제일 안 어울리는 녀석이…… 분발했군요.”


 갈라지는 목소리 끝을 숨기려 헛웃음을 흘리며 사과를 한 입 깨물었다.


 “그렇죠? 저 솔직히 감동했어요. 동생도 무척 기쁜 눈치였어요. 캐물어 보니 남자들끼리 이야기라며 얼버무렸지만 입에 귀에 걸렸던 걸요. 어차피 곁에서 다 들었는데 말이에요. 저 사실 특상과에 배치되어 처음 토마리 선배님과 행동하게 되었을 때는 잘 해나갈 수 있을지 많이 불안했어요. 어느 날 불쑥 사직서라도 내시지 않을까 걱정도 했고요. 하지만 토마리 선배님이 제 동생에게 그 말씀 하시는 걸 듣고 아, 이젠 됐다고 생각했어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겠다고요.”


 그녀의 말은 입에 넣은 과육이 곤죽처럼 으깨지도록 이어졌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컸다. 무의식중에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러니 선배님께서도 토마리 선배 걱정은 마시고 재활에 전념해 주세요. 이야기는 아마 그런 말로 끝났을 것이다. 다음에 또 오겠다며 일어서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창문 좀 열어주겠어요?”


 열린 창문을 통해 이른 봄바람이 불어왔다. 서늘한 저녁 공기가 짙은 꽃향기를 묽힐 때까지, 그녀가 병실을 떠난 뒤로도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3.


 며칠째 이어진 잠복근무 탓에 차 안에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다.


 -제압할 필요도 없어. 이 안으로 끌어들이면 냄새 때문에 기절해버릴 테니까.


 토마리는 투덜대며 두 개째 팥빵을 입 안으로 욱여넣었다. 바닥에는 앞좌석 뒷좌석 가릴 것 없이 몇 장이나 되는 팥빵 껍질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지겨워 죽겠군. 아~ 목욕하고 싶다! 이번 일 끝나면 같이 온천이라도 갈래?

 -너랑?

 -아니, 그 말투 뭐야? 나랑 가면 안 될 데라도 돼?


 쉽게 발끈하는 버디의 목소리에 소리죽여 웃으면서 딱딱해진 어깨를 돌려 풀었다. 짙은 선팅 유리 너머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그래, 온천 좋지. 한 이 박 삼 일 정도로 푹 쉴 수 있으면 좋겠다.

 -오, 기왕이면 노천탕 있는 곳으로 가자. 술도 마시고 나베 요리도 먹어야지. 집에 유카타 있던가? 고등학생 때 입던 건 작아서 버렸을 것 같은데.

 -고등학교 이후로도 키가 컸어?”

 -아마 대학교 2학년 때까지 컸을 걸. 축구 그만둔 뒤에는 따로 안 쟀는데, 팀에서 마지막으로 잰 키랑 입사 건강검진 때 키랑 똑같았으니까 그쯤.

 -축구 계속했더라면 지금보다도 더 클 수 있었던 거 아냐?

 -됐어. 그렇게까지 크고 싶은 마음도 없고. 지금 정도가 딱 좋아.

 앞좌석으로 턱 뻗대는 다리를 후려치자 토마리는 엄살을 떨며 죽는 소리를 냈다.

 -후회하진 않아?

 -축구 그만 둔 것? 별로. 어차피 프로팀에서 주전으로 뛰지 못할 바에야 일찌감치 접고 다른 길 찾는 게 나아. 사실 더 빨리 그만뒀어야 했어. 발이 빨라서 볼 뺏는 건 잘했지만 골을 못 넣었거든. 잠재성이니 뭐니 운운해도 골을 못 넣는 스트라이커는 결국 벤치 신세야. 벤치만 지키는 건 영 성미에 안 맞더라고. 남자라면 역시 최전방에서 달려야지.


 어깨 너머로 흘끗 돌아보니 토마리는 쾌쾌한 차 안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시원한 표정이었다. 이유 모를 안도가 스몄다. 풀어지는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되돌렸다.



 토마리처럼 제 이름과 꼭 닮은 사람도 드물지 않을까. 매번 한계까지 액셀러레이터를 밟아 어디까지고 내달려 버리는 버디 덕택에 곤란한 처지에 빠진 적도 많았다. 나란히 호출되어 눈물이 쏙 빠지도록 꾸중을 듣는 건 예사고, 둘이 머리를 맞댄 채 팔자에 없는 시말서를 써본 적마저 있었다. 그렇게 노상 좌충우돌하는 버디인데도 토마리가 싫어지는 일은 없었다. 비번인 날에는 서로의 집에서 하릴없이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비번일마다 서로의 집에 오가기 시작한 후 몇 번째인가의 휴일, 요란한 스플래터 영화를 보던 도중 입을 열었다. 토마리, 내가 네 브레이크가 되어 줄게. 브라운관에는 살인마가 바로 등 뒤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정신없이 사랑을 나누는 어린 연인들이 비치고 있었다. 맥락 없는 말에 토마리는 화면에서 눈을 떼고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 비다.


 토마리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손톱자국처럼 가늘게 듣던 빗방울은 삽시간에 굵어져 후득대며 차체를 때렸다. 그렇지 않아도 밤이라 시야 확보가 어려운 와중에 진퇴양난이었다. 뒷좌석을 향해 물었다. 와이퍼 켤까? 뜻밖에도,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온 것은 전혀 다른 말이었다.


 “토마리, 서둘러!”


 언제 차에서 내렸던가. 쏟아지는 빗발이 거세어 눈을 뜨는 것조차 힘겨웠다. 추위로 이가 딱딱 부딪쳤지만 몸을 떨고 있을 틈이 없었다. 달리던 도중 익숙하고 낯선 감각에 퍼뜩 놀랐다. 내 두 다리가 힘차게 땅을 박차고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꿈이구나.


 달아난 범인들을 좇아 공장부지 안으로 들어서며 외쳤다. 토마리, 이쪽으로 오면 안 돼! 말은 소리를 이루지 못하고 공기 속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가까스로 붙든 용의자가 팔을 크게 휘둘렀다. 주춤한 틈을 타 용의자는 철제 계단 위로 달아나려 했다. 숱하게 꾼 꿈 그대로였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까지 헤아린다면 이제껏 내가 살아오며 꾸었던 모든 꿈보다 더 많이 꾸었을 꿈. 그런데도 곧 닥칠 일순간이 사무치게 두려웠다. 돌연한 중가속 현상이, 총성이, 토마리의 비명이, 폭발음과 불길이, 한없이 긴 추락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거대한 철근들과 움직이지 않는 몸이.



 등이 움찔 튀어 오르는 통에 제 풀에 놀라 눈을 떴다. 사위는 엷은 어둠에 잠겨 푸르스름했다. 정말 비라도 맞은 듯 온 몸이 축축했다. 이마도, 머리칼도 푹 젖어 있었다. 팔을 뻗어 주변을 더듬었다. 젖은 아스팔트 대신 잘 마른 침대 시트가 만져졌다. 손끝에 부딪친 휴대폰을 집어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푸르스름한 액정에 새겨진 숫자는 사고로부터 4개월 후의 날짜를 가리키고 있었다. 꿈이지만 꿈이 아니었다. 희미한 요의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너스콜을 누르려다 어차피 곧 날이 밝으리라는 생각에 손을 거두었다. 땀에 젖은 환자복 윗도리를 벗어 던져두고 담요를 휘감았다. 몸을 둥글게 만 채 눈만 깜박이고 있으려니 막 잠에서 깨어 둔해졌던 감각들이 서서히 되돌아왔다. 간간이 희미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 의사들, 간호사들, 직원들, 혹은 바지런한 보호자의 것이리라.



 토마리도 자동차를 좋아했다. 토마리의 집에 찾아가면 토마리는 장식장에 진열된 작은 미니카를 가리키며 차종을 줄줄 읊어주곤 했다. 어느 날인가, 설명을 마친 후, 자신이 있는 집 자식이었다면 F1 레이서를 지망했을 거라며 멋쩍게 웃은 적이 있었다.


 -경기, 같이 보러 갈래?


 가볍게 던진 말에 토마리는 눈을 빛냈다.


 -올해 10월에 일본에서 15회 차 그랑프리가 있어. 이번 대회는 스즈카 서킷에서 열리니까 별로 멀지도 않아. 미에 현이거든. 우리 둘이 비번 맞추면 당일치기라도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


 자동차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데이트 플랜이라도 짜는 양 벌써부터 설레어 하는 토마리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토마리는 만화처럼 두 손을 들어 만세를 불렀다. 나는 토마리의 소년시절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괜히 부끄러워졌다.


 -사실 며칠 후에 바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개막전이 있는데…….

 -오스트레일리아? 그렇게 긴 휴가를 주진 않을걸. 그것도 신참을 둘이나.

 -하긴 그런가……. 그럼 중국은 어때? 4월에는 중국에서 하는데.

 -거기도 하루 이틀 정도는 휴가를 받아야 할 것 같지만.

 -좋아! 과장님이 찍소리도 못 하고 휴가를 내 줄만한 실적을 올려주지!


 그 해, 우리는 오스트레일리아에도, 중국에도, 미에 현에조차 갈 수 없었다.




4.


 “하야세 씨, 회진입니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울렸다. 흰 시트에 반사된 햇살이 눈시울 사이로 따갑게 스몄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야세 씨? 어디 불편하세요?”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하자 주치의가 몸을 숙여 열을 쟀다.


 “열이 있네요. 언제부터 이러셨죠?”

 “가벼운 오한 정도는 며칠 전부터 잠깐씩……. 어젯밤에 식은땀을 많이 흘렸습니다.”

 “감기몸살 같군요. 오늘은 재활 없이 푹 쉽시다. 말씀드렸죠? 무리하면 탈난다고요.”


 주치의가 감기약을 처방하는 동안 간호사는 새 환자복을 꺼내주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떠난 후 아침 식사가 배식되었다. 평소라면 간병인이 도착했을 시간이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 식욕도 나지 않았던 터라 식사를 물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오늘은 토마리가 비번인 날이라 일찍 병문안을 올 것이다. 그때까지 더 자 두고 싶었다. 그러나 눈 감은 채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 잠이 올 기미가 없었다. 도리어 새벽녘에 느꼈던 요의만 강해져 아랫배를 묵직하게 눌렀다. 간병인이 올 수 없는 상황이라면 오늘은 급한 대로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었다. 혹시 자는 동안 간병인에게 온 연락을 놓쳤나 싶어 머리맡에 둔 휴대폰을 찾아 팔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 했다.


 잠이 덜 깬 탓인가 싶어 심호흡하며 손가락 끝에 힘을 집중했다. 움직일 수 없었다. 감각이 돌아오지 않은 하반신은 물론 어깨, 팔, 손목, 열 개의 손가락과 각각의 세 마디 가운데 어느 하나도. 미처 깨지 않은 꿈인가 싶었지만 힘을 주느라 깨문 입술의 아픔이며 배어나온 피가 입 안에 흘러들어 비린 맛은 선명했다. 하반신을 짓누르는 요의 또한 그랬다. 물론 오감이 선명하다 해서 꿈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지난밤 땅을 박차며 달리던 감각은 얼마나 또렷했던가. 스스로 돌아눕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육신이 꾸기에 과분한 꿈이었다. 하지만 과분한 꿈의 대가라면 어제까지의 현실로도 족했으리라.


 꿈일지라도 처참한 가혹 속에서 나는 짤깍대는 초침 소리를 세며 토마리를 기다렸다. 헤아리는 숫자가 커지는 만큼 요의도 강해졌다. 처음에는 먼 물결 같았던 감각이 어느새 바짝바짝 육박해 이윽고 발아래까지 다다랐다. 입술 근처에 맴돌던 통각도, 미각도 그 물살에 씻겨 멀어져갔다. 마우스피스를 물고 싶었지만 머리맡의 협탁에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초침소리조차 이미 한계까지 팽창한 방광에 똑똑 떨구어지는 오줌방울 소리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하반신 전체가 거대한 방광이 된 것 같았다. 한계였다. 누운 자리에 그대로 방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순간, 아무 예고 없이 병실 문이 열렸다. 가까스로 고개만 숙여 시선을 떨구자 눈을 휘둥그레 뜬 토마리의 모습이 있었다.


 “하야세, 오늘은 재활 없는 날이야? 지금 재활 시간 아닌가?”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 같아 마른침을 삼키고 목을 가다듬었다.


 “감기 몸살 기운이 있어서, 조금.”

 “감기 몸살? 괜찮아? 간병해주시는 분은 어디 가셨어?”


 토마리는 꽃다발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허둥지둥 다가와 내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얼굴이 핼쑥해. 식은땀도 엄청 나잖아. 약 먹었어? 의사…….”


 이어지려는 토마리의 말을 끊었다.


 “미안하지만 침대 아래…… 소변통 좀 줄래?”


 토마리는 급히 몸을 숙여 소변통을 꺼내들었다. 이제 소변통을 받아들고 몸을 일으켜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보면 되었다. 하지만 그 중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울컥 눈물이 솟았다.


 “하야세? 하야세, 왜 그래?”

 “몸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숨을 삼키는 기척이 났다.


 “잠깐, 일단 진정해. 괜찮아. 하야세, 괜찮아.”


 토마리는 지난밤부터 꼬박 모로 누워 있던 나를 안아 일으켰다.


 “너 감기 몸살이라면서 옷도…….”


 토마리는 질책의 말을 잇는 대신 내 바지춤을 내렸다. 바짝 선 성기가 토마리의 손에 쥐여져 소변통 안으로 귀두를 들이밀었다. 나는 안도감에 몸을 떨며 오줌을 누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기세 좋게 뿜어져 나온 오줌줄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플라스틱 용기를 때렸다. 흐느낌으로도 가리워지지 않는 소리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토마리는 말없이 소변통을 치우고 내 바지를 추슬러주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인형처럼 늘어진 내 몸을 깊이 끌어안았다. 나는 토마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살결에서 시린 바람 냄새가 났다. 흐려진 시선 끝에 널따란 토마리의 어깨가 닿았다. 그곳에는 마른 볕이 슬픔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눈을 감았다. 그토록 요란하던 초침 소리가 어느새 멎어 있었다. 나는 토마리의 등에 두 팔을 둘러 줄 수 없어 감사했다. 




만수(@crowmysimobe)님의 토마하야 카운트다운 연성에서 착안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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